금성단(錦城壇)에 올라 ①압각수(鴨脚樹)를 볼 때 누군들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공경하는 마음이 일지 않겠는가, 이제 이 ②괴(槐)나무는 옛일을 추모하여 감회를 자아내게 하는것이니 시가(時歌)로서 선생의 절의(節義)를 찬양하는것도 (志士) 인인(仁人)의 할 일이리라.
괴(槐)나무는 고(故) 도촌(桃村) 이선생이 손수 심은 나무이다.
전에 ③눌은(李訥隱) 이 공의 당실제도(堂室制度)를 상세하게 쓴글을 읽었는데 거기에 집앞에 심었던 괴나무에 관한 언급이 없는것은 그 나무가 이미 쓰러져 썩어서 거기에 주의를 기울일 만한 대상이 못되는 것으로 생각 했기 때문이였던가.
지나간 어느해 순흥 사람들이 공과 ④금성대군(錦城大君) 및 ⑤이대전(李大田)의 행적이 비록 다르나 그 마음은 동일 하였기에 드디어 공의 사당(祠堂)에 배향(拜享)토록 하였는데 이 해에 괴나무의 옛 뿌리에서 새 가지가 돋아났으니 이또한 압각수(鴨脚樹)와 같은 기적을 나타낸것이 아니겠는가, 그런일이 있은 뒤에 암행어사가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공에게 승지(承旨)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나는 돈암(遯菴) 서공(徐公)의 구구리(九皐里)에 있는 ⑥상절사(象節祠)를 참배하고
그날 공의 구택(舊宅)을 방문하여 괴단(槐壇) 위에 자리를 펴고 주위깊게 바라보니 그 뿌리는 크고 줄기가 가는것을 보아 과연 몇백년 후에 돋아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단순하게 식물이 죽었다 살아나는 현상으로 보아 넘길것인가,
오호라!
그 절의를 숭상하고 교화로 권장하는 것은 사람이하는 일이요,
그때를 따라 영화롭게도하고 시들게도 하는것은 하늘의 힘이라. 하늘이 보딥하고 배푸는 것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신하된 자로서 또한 행해야 될 도리에 부지런해야 할 바를 알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독(侍讀) 김우수(金禹銖)와 검토관(檢討官) 권영하(權泳夏)가 그 사실을 상세하게 소개 하였고 률토(律討) 한 수를 지어 차운(次韻)토록 하였으니 또한 흥모(興慕)하는 여러 선비와 공의 후예들의 시를 열록(列錄)하여 책이름을 괴단광감록(槐壇壙感錄)이라 하였는데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니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삼가 이와 같이쓴다.
景泰 丁丑 哲宗 10(1859) 후 430년 기미 十 월 일
眞城後人 ⑦李 晩 慤 謹序
-= 註 =
①압각수(鴨脚樹) : 도목 제48호 금성대군(錦城大君)변란에 고사(枯死) 하였다가
신원 직전 200여년 만에 소생한 신비한 나무.
압각수(鴨脚樹)란 은행나무의 다른 이름으로 잎사귀 모양이 마치 오리발과 같다는데서 유래한다. 순흥면 소수서원(紹修書院)과 금성단(錦城壇) 부근에는 오래묵은 은행나무가 여러 그루있다.
순흥부사 조덕상[(趙德常) 1753 ~ 1757재임]의 “압각수기(鴨脚樹記)”가 있다. 순종7년 (1681) 봄 새가지가 나고 잎이 피기 시작하여 그삼년만인 숙종9년에 순흥(興州府)이 회복되었다.
② 괴(槐)나무 : 회화나무라고도함. 콩과의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목재는 건축이나 가구재작에 쓴다. 줄여서 홰나무라고도함. 선현들은 이 나무를 아껴서 자신의 호(號)로 애용하기도 했고 동리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 신성시 하기도 했다.
③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 1674 ~ 1756
④금성대군(錦城大君) : [(세종8(1426) ~ 세조3(1457)]
아버지는 세종대왕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태조의 일곱째아들 芳蕃의 후사로 출계(出系)했다. 1455년 수영대군에 의해 당을수립한다는 죄목으로 삭영(朔寧)에 유배되고 이어 광주(廣州)로 이배 되었다가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또다시 순흥(順興)으로 이배 되었다. 순흥에 안치된뒤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하여 ??문을 돌리고 의병을 규합하여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거사직전 관노(官奴)의 고변으로 실패하여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시호는 정민공(貞愍公)
⑥상절사(象節祠)
단종 폐위에 울분으로 고향을 버리고 당시 순흥땅 여천리(汝川里)에 터를 잡은 둔암(遯庵) 서한정(徐翰廷) [태종7 (1407) ~ 성종21 (1490)]의 불천위(不遷位) 사당(祠堂)을 말함.
당시는 구구리에 있었으나 대원군 서원 철패령으로 인해 훼철 되었다가 뒤에 후손들에 의해 사천1리 현 위치로 이전하여 구구서당(九皐書堂) 뒤에 불천위 사당인 상절사(象節祠)를 모셨다.
⑦이만각(李晩慤) 순조15(1815) ~ 고종1 (1874)
字 : 근휴(謹休) 號 : 신암(愼庵) 巖后, 진성인(眞城人) 외숙인 정??(定??) 유치명(柳致明)에게 배웠다. 1856년 박규수(朴珪壽)의 추천으로 선공감감역에 추찬되었으나 나다지 않았다.
일찍 영리에 뜻을 버리고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당대의 석학 이돈우, 강건, 우희석등과 교유하였다.
계서약선(溪書約選)”을 편찬하고 “신암문집(愼庵文集)“ 10권을 남겼다.
이관석
삼은(三隱) = 고려 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두고 이르는 말.